어제 인사드렸던 신입 연구원 입니다ㅎㅎ
잠이 안 와서 노트에 짧게 써봤던 단편인데 첫 글로 조심스럽게 올려봐요!
가볍게 읽어주세요ㅎㅎ
절판된 지 오래된 단편 소설집을 구하려고 중고거래 앱에 알림 설정을 해둔 지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드디어 옆 동네에 단돈 이천 원짜리 매물이 올라왔고 나는 판매자에게 비대면 문고리 거래를 요청했다
판매자가 알려준 주소는 우리 학교 뒤쪽 골목의 낡은 붉은 벽돌 빌라 3층이었다
낮인데도 복도 창문이 작아서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어둑어둑한 기운이 감돌았다
404호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보통의 문고리 거래처럼 쇼핑백이나 비닐봉지가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표지가 낡은 소설책 한 권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뭔가 기분이 묘해서 허리를 숙여 책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현관문 문틈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서늘한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열려 있었는데 그 어두운 틈 너머로 누군가 가만히 서서 정수리 위쪽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내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마자 안쪽에서 "쾅!" 하고 성급하게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이중 잠금장치가 철컥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나는 심장이 두근거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새벽 세 시 반쯤 잠이 오지 않아 책상 스탠드만 켜놓고 낮에 가져온 책을 펼쳤다
누렇게 바랜 페이지 곳곳에는 전 주인이 그어둔 듯한 연필 밑줄이 남아 있었다
처음 30페이지까지는 평범하게 감성적인 문장들에 정갈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 사람도 나랑 취향이 비슷하네 하고 작게 미소를 지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자 밑줄의 형태가 이상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문장 전체가 아니라 한 페이지에 딱 한 단어씩만 연필심이 부러질 듯 꾹꾹 눌러쓴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처음엔 무슨 암호인가 싶어 연습장을 꺼내 밑줄 친 단어들만 순서대로 옮겨 적어보았다
[오늘도] [스탠드] [불만] [켜고] [있네] [커피는] [다] [식었어]
완성된 문장을 읽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내 방은 지금 암막 커튼을 친 채 책상 스탠드 하나만 켜져 있었고 내 왼손 옆에는 한 시간 전에 타놓은 머그잔 속 커피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설마 우연이겠지 싶어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페이지들을 빠르게 넘겨 단어들을 이어 읽어보았다
[작년] [여름] [비] [오던] [새벽에도] [그렇게] [서] [있었잖아]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서 내가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려 했던 작년 여름의 기억이 강제로 끄집어내졌다
작년에 내가 살던 곳은 이 동네에서 몇 블록 떨어진 2층 자취방이었다
장마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새벽 세 시 반쯤 잠이 안 와 창밖을 보던 나는 맞은편 낡은 빌라의 복도 계단 창문 너머로 기괴한 실루엣을 목격했다
누군가에게 머리채와 손목을 잡혀 계단 위로 질질 끌려 올라가던 한 여자가 필사적으로 복도 유리창을 두드리며 밖을 내다보았고 어둠 속에서 내 방 창문에 서 있던 나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창문에 짓눌린 여자의 입 모양은 분명히 살려주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신고를 하기는커녕 내 얼굴을 들켜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에 뒷걸음질을 치며 암막 커튼을 휙 닫아버렸다
그리고 귀를 막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고 한 달 뒤 죄책감에 도망치듯 지금의 방으로 이사를 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니 연필 자국은 이제 종이가 찢어질 듯 새까맣게 뭉개져 있었다
[나랑] [눈] [마주쳤는데] [왜] [커튼] [닫았어] [계단에서] [계속] [불렀는데]
그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소름 끼치는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오늘 낮에 내가 이 책을 주워 온 그 붉은 벽돌 빌라가 바로 작년 여름 내가 커튼을 닫고 외면했던 그 맞은편 빌라였다는 것을
책을 덮으려는데 마지막 세 페이지의 밑줄 색깔이 달랐다
흑연이 아니라 아직 채 마르지 않아 번들거리는 빨간색 볼펜 잉크였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마지막 페이지의 빨간 밑줄 단어들을 눈으로 쫓았다
[네] [책상] [위] [빨간] [볼펜] [참] [잘] [써진다] [고개] [들지] [마]
얼어붙은 채 시선만 옆으로 돌리자 분명히 내 필통 안에 꽂혀 있어야 할 빨간색 볼펜이 뚜껑이 열린 채 책상 모서리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내 책상 바로 위 천장 쪽에서 빗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낮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